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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예술가 빈센트 반 고흐의 일생 (네델란드 인상파 화가)

블랙베리가 2018. 11. 8.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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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후기 인상파 화가)

 

1853년 3월 30일 태어나 1890년 7월 29일 사망한 네델란드 화가이다.

본명은 빈센트 빌럼 판호흐(Vincent Willem Van Gogh)

 

고흐는 개혁교회 목사의 맏아들로 태어나 죽은 형의 이름으로 살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다른 형제들 보다 동생 태오를 아꼈는데 태오가 결혼할 때 세번이나 졸도를 할 정도였다고 하며 예술가 지망생인 여동생 윌과도 사이가 좋았다.  어릴 때는 과학자처럼 곤충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고 독서광이기도 했던 고흐는  취미생활로 미술을 즐겼던 어머니에게서 미술적 재능을 물려받았지 않았나 추측한다. 

11살 때 제벤베르헨의 기숙학교에서 영어,독일어,프랑스어를 배우고 13살에 튈뷔르흐의 빌헴2세 국립중학교에 진학해 네델란드 출신 화가 C.C 호이만스 밑에서 미술 수업을 받았으나 원근법을 익히지는 못했다고 한다. 

 

 

 

 

1868년 자퇴하여 16세 때 아버지와 우애가 깊었던 큰아버지 밑에서 일하게 된다.  큰아버지 센트는 프랑스의 바르비종파의 화풍을 수집해 판매를 하기도 하고 화가들도 기르고 있었는데, 아틀리에를 벗어나 자연 속에서 스케치를 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경험은 고흐의 그림에서 자연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데, 이 때 접하게 되는 밀레의 그림 '이삭 줍는 사람들'에게서도 큰 영향을 받는다. 

그 후 런던 지점으로 간 고흐는 그곳에서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 하숙집 딸 로제니와의 실연,  감언이설로 그림을 파는 화상들에 염증을 느껴 구필화랑을 그만두게 된다. 

잠시 보조목사가 되어 목사의 꿈을 꾸기도 했으나 조울증으로 모든 일에 흥미를 잃고 28세 때 브뤼셀로 간다.  외사촌 안톤 모베에게서 몇 년간 그림지도를 받았다.  고흐는 딸이 하나 있는 매춘부 시엔과 동거를 하다 파탄이 나자 양심의 가책을 안고 그녀와 결별한다.

 

 

 

 

Girl in the street, Two Coaches in the Background (1882)

 

그 후 니암스테르담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색체의 활용면에서 실력 있는 화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뇌넨의 아버지 집으로 옮겨간 고흐는 목사관 뒷뜰의 헛간에서 그림을 그리고 그러던 중 1885년 아버지가 사망한다.  그 후 들라크루아의 색채론을 탐독하면서 그의 그림에 다양한 색채가 더해진다.  뇌넨을 떠나기  전 아인트호벤 케세르마케르스라는 사람에게 가을 풍경 한 점을 선물로 주는데 사인을 하지 않은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고 한다.

"사람들은 반드시 나의 그림들을 알아보게 될 것이고 내가 죽으면 틀림없이 나에 대한 글을 쓸 것이다.  만일 오래 살 수 있도록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그것을 확실히 입증해 보일 것이다."

 

감자 먹는 사람들 (1885)

 

 

 

 

 

1886년 파리에서 전위적인 예술 기류에 영향을 받는다. 인상주의 화가들과 신인상주의 화가들로 부터 큰 영향을 받으며 역사화가 페르낭 코르망 작업실에서 수련을 쌓았다. 

 

몽마르트 언덕의 채소밭 (1886)

 

고흐는 인상주의에서 밝은 화풍으로 바꾸기 위해 남프랑스 아를로 이주해 화가들의 공동체를 만들려 했으나 그 제안에 응했던 사람은 폴 고갱 뿐이었다. 같이 생활하던 두 사람은 그림 그리는 방식에  의견차가 심해 갈등이 폭발하고 1888년 정신발작을 일으킨 고흐가 자신의 왼쪽 귀(귓볼)을 면도칼로 잘라 2달 만에 결별한다. 

 

신발 (1886)

 

 

 

 

 

1988년 2월 아를 시립병원에 입원을 하였다가 퇴원하였으나 발작증세로 시민들이 고흐를 강제로 입원시키라고 민원을 넣자 다시 입원을 하였는데 고흐는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이 강제 입원시키라고 청원을 한 것에 분통을 터뜨린다.

 

아를의 포룸 광장의 카페테라스 (1888)

해바라기 (1888)

1889년 5월 고흐는 테오에게 부탁해 생레미의 생폴 요양원으로 가게 된다.  생레미 시절 사이프러스 나무를 소재로 한 작품 등은 그의 후기 걸작으로 일컬어지는데 자르면 뿌리가 나지 않는 사이프러스 나무와 영원을 상징하는 별은 죽음을 은유한다는 해석도 있다.  이 시기 서서히 그의 이름이 알려지고 몇 몇 전시회에 그의 그림이 초청 받고 호평을 얻기 시작했지만 우울증이 심해져 뛰어난 그림에 집중하고 싶었던 생각과는 달리 스스로의 그림에 혹평을 가하고 비관을 자주 했다고 한다. 

'나는 내 삶을 위한 어떠한 확신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별들의 풍경은 나를 꿈꾸게 한다.

For my part I know nothing with any certainty, but the sight of the stars makes me drem.'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1889)

1890년 5월 인상파의 선두주자인 카미유 피사로의 충고를 받아들인 태오는 고흐를 파리 인근 시골 마을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낸다.  이곳은 자연 풍경이 좋아 여러 화가들이 머물며 그림을 그리던 곳으로 고흐는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게 되는데 빠르고 투박한 붓놀림과 강렬한 인상을 주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과 같은 작품이 있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 (1890)

1890년 7월 27일 근처 들판을 서성이다 스스로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쏘아 피투성이가 된 고흐는 여관으로 돌아와 쓰러지고 1890년 7월 29일 동생 태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고흐는 세상을 떠난다.

형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서인지 6개월 후인 1891년 2월 25일 테오도 결국 죽는다.

고흐는 인상파,야수파,초기 추상파,표현주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로 평가 받으며 10년 동안 900여점의 그림과 1100여점의 습작품을 남겼다.

귀가 잘린 자화상 (1889)

아를의 붉은 포도밭 (1888)

탕귀 영감 (1887~1888)

앙글루아 다리 (1888)

나무 줄기 (1890)

피아노에 앉은 가셰의 딸

올리브 나무 숲 (1889)

양치는 여인 (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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